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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교”라는 용어의 어원과 의미

 

“선교(mission)”라는 용어는 성서에서 온 것은 아니다. 이 말은 라틴어 “mitto”(mittere, missio)에서 유래된 것으로 그 뜻은 ‘보내다, 파견하다’이다. 명사형일 때 ‘내보냄(sending out)’을 의미함은 물론이다. 정부가 외교관을 보낼 때는 특별한 임무를 주어 보낸다. 그런 경우 mission이라는 말이 사용된다.

 

종교적으로 mission이라는 말은 ‘사명과 위임을 주어 보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 임무는 아직도 믿지 않는 사람이거나, 믿다가 더 이상 신앙을 유지하지 않는 사람이나, 방황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이 뜻은 헬라어 ‘아포스텔로(ἀποστέλλω)’와 ‘펨포(πέμπω)’에 해당한다. 아포스텔로는 구약(70인경)에서는 700 회 이상 사용되었고, 신약에 약 135 회 사용되어 있다. 펨포는 구약에 단지 26 회만 사용되었고, 신약에는 약 80 회가 사용되었다.

mission과 missions 를 구분하여 쓰기도 한다.

 

피터즈(George W. Peters)는 mission을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총체적인 성경적 과업’으로 사용한다. 교회 안팎의 사역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용어로 쓰고 있다. 교회는 이 세상에 보내진 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missions 는 특수화된 용어라고 그는 말한다.

신약 시대 교회가 변경(邊境)과 그의 직접적인 복음 영향권 너머에 공인된 사람을 보내어 복음의 빈곤 지역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함과, 타신앙 내지는 무신앙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의 회심자를 얻어내는 것과, 속한 단체나 나라에서 기독교의 열매를 거두며 활동하며 성장하는 지역 교회를 세우는 일을 의미한다고 한다.

 

보쉬(David J. Bosch)에 의하면 Mission(사명 선교)은 ‘하나님의 선교, 즉 세상을 사랑하시는 자인 하나님의 자기 계시, 세상에서 또 세상과 더불어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참여, 교회가 세상에 참여될 특권을 갖는 것이다’라고 정의한다. Missions(해외 선교)는 ‘하나님 선교의 구체적인 시기들, 장소들, 욕구들, 참여 등이다’라고 말한다.

 

 

2. ‘선교’의 정의 및 범위

 

 

앞에서 ‘선교’의 일반적인 의미를 살펴보았다면, 신학적인 의미에서 ‘선교’를 정의하면 다음과 같다.

 

1) 복음주의적 견해

 

보통 선교라 함은 하나님의 복음이 아직 전해지지 않은 해외 또는 타문화권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 또는 복음을 전하기 위한 모든 방법과 활동을 말한다. 이에는 전도자를 해외에 파송하여, 전도하고, 교회를 개척하여, 성장시키며, 복음적인 사업을 수행하는 것 등을 포함한다.

 

선교를 이렇게 단순히 ‘복음 전파’의 측면에서, 특별히 한 개인의 영혼 구원의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을 고전적, 전통적 견해라 할 수 있다. 이를 또한 복음주의적 견해라고 하는데, 이에 의하면 선교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교회 개척이며,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 복음이 실제로 전달되지 않는 전도나 선교는 있을 수 없게 된다.

 

선교에 대해 복음주의적 견해를 가진 이들은 사회의 구조적 변화에 대해 교회가 직접 참여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복음주의자들은 구조적 변화를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전도의 결과로 이러한 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복음주의자들이 강조하는 것은, 혁명보다는 점진적인 인간 성숙이 사회구조의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주의자들은 선교 활동 중, 농업 기술 교육, 의료 봉사 및 일반 교육 등을 통해 사회에 참여하고, 이런 활동들이 차츰 차츰 한 국가의 하부구조의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한다.

 

2) 에큐메니칼적 견해

 

이에 반해 선교를 ‘샬롬’과 ‘인간화’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견해가 있는데 이를 에큐메니칼 선교관이라 한다.

 

즉, 선교란 단순히 한 개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불평등과 차별이 존재하는 인간들 사이 또는 그룹들 사이에 진정한 화해를 이루고, 나아가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곳에서 모든 인간들이 참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이해하는 견해이다. 이런 에큐메니칼적 선교관은, 복음주의적 선교관이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 관심을 가지는 것에 반해, 복음이 전해져 있는 곳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종래의 선교관이 교회 개척이나 교회 확장에 목표를 둔, 교회 중심의 선교관이라고 비판하고, 교회는 ‘이 세상에 평화(shalom)를 건설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손에 들려 진 수단’에 불과하다고 한다.

 

선교(evangelism)의 주체는 교회가 아니라 메시야(즉 그리스도)이시며, 선교의 목적은 곧 “샬롬”의 수립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샬롬은 개인의 구원보다는 훨씬 더 많은 것을 의미한다. 즉 평화, 온전함, 공동체, 조화, 정의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런 뜻에서 선교는 세 가지 측면을 가진다.

 

케리그마, 코이노니아, 그리고 디아코니아가 그것이다. 케리그마는 그 샬롬의 선포요, 코이노니아는 그 샬롬에 동참한 사람들이 상호 교제와 친교 가운데 사는 것이며, 디아코니아는 겸손한 봉사로써 그 샬롬을 실증하는 것이다.

이 세 측면이 선교에서 통합될 때 그 선교는 올바른 선교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 전파’만이 아니라 ‘친교’나 ‘봉사’도 선교의 목표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기초로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곧 ‘선교는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점이 강조된다. 곧 교회가 선교의 출발점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 출발점이며, 선교의 주도권 또한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해 있다.

 

이렇게 하나님이 선교의 주역이시기 때문에 ‘교회의 선교’, 또는 ‘우리들의 선교’라는 말은 사용될 수 없는 개념이 된다. 전통적인 선교관에서처럼, 제도로서의 교회가 그 제도를 지나치게 절대화한 나머지 하나님에게만 속한 복음과 그 선교를 교회 자체를 위한 수단으로 삼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도 위반되고 교회 본연의 사명에도 위배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교’ 개념에 따르면, 선교는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하고 계시는 것으로서, 교회는 선교의 도구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의 기능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함으로써 세상의 사건에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일이다. 교회가 이런 일을 성취하지 못한다면 교회는 쓸모없는 도구가 될 뿐이다.

 

샬롬과 더불어 선교의 목표로 받아들여진 개념은 “인간화”이다. 즉 사회 구조를 인간화하는 것을 선교의 한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화와 교회 개척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답게 살게 하는 일과 사회 구조의 근본 변화를 선교의 목표로 삼고, 선교의 방향은 인종 문제 사회변혁, 학생 항거 운동 등에로 바꾸어져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선교에 대한 이해가 이와 같이 달라짐에 따라 구원에 대한 이해에도 변화가 온다. 전통적으로 구원이라는 말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새롭고 영원한 신분이라고 이해하여 온 데 반하여, 새로운 선교를 지향하는 사람들은 ‘오늘의 구원’을 강조한다.

 

다른 말로 바꾸면 인류는 가난과 압제와 질병과 비인간적인 노동과 인종차별과 기아 등으로부터 구원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머지않아 가게 될 하늘에 있는 빵이 아니라 지금 당장 먹을 수 있는 빵이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교에는 복음 전파뿐만 아니라 친교와 봉사가 포함되어야 하며, 나아가서는 이 땅 위에서의 다방면에 걸친 정의가 실현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선교관에 대하여 비판의 소리도 높다.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우선 순위 1 번에 놓을 것인가? 하는 것이 맨 먼저 제기되는 문제이다.

 

그렇게 볼 때 에큐메니칼 선교 이해는 ‘선한 사업들’ 때문에 가장 중요한 일 곧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그 일을 소홀히 하게 된다.

 

가난한 자들에 대하여 깊은 열정을 가지는 것은 좋으나 잃어 버린 자들에 대한 열정은 없고, 나아가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도록 일깨우기보다는 교회 갱신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다.

전혀 복음에 접해 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고, 아직도 선교사들이 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를 보내는 일에는 관심이 적다.

 

3) 통전적 견해

 

선교란 무엇인가? 에 대해 이렇게 두 가지 상반된 견해가 존재하지만 이 두 입장을 잘 조화시킨 것으로서 맥거브란(Donald A. Mcgavran) 의 정의를 들 수 있다.

 

선교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혀 충성을 바치지 않고 있는 자들에게 문화적 장벽을 너머 복음을 전하는 것이며, 그들을 일깨워 그리스도를 그들의 주와 구주로 받아들여 그의 교회의 책임있는 구성원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복음 전도와 정의실현을 위해 일하며,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 위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일하는 것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선교의 폭은 매우 넓어진다. 단순한 복음 전파만이 아니라 교육, 문화 활동, 사회 활동 등 그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하나님이 땅 위에서 이루실 뜻의 성취를 위한 것이라면 모두 선교 활동에 포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중심은 어디까지나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따르며 그의 교회의 일원이 되어 일하게 하는 데 있게 된다.

 

이러한 선교를 통전적 선교라 부르기도 한다. 이런 입장에 서게 되면 사람의 구원을 말할 때도 영혼의 구원이라는 말보다는 전인적(全人的) 구원을 말하게 되며, 영혼과 육체 전체의 구원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사회에 관심을 가질 때에도 사회 전반에 걸친 관심을 가질 것이다. 단지 궁극의 목적은 복음을 통한 구원에 초점이 맞추어 질 것이다. 이런 선교가 행해질 때 사회나 인간사 전반에 걸친 개선과 발전은 당연한 귀결로 도래될 것이다.

 

 

3. 성경 속에 나타난 선교

 

 

선교가 위와 같이 정의될 때, 선교가 성경 속에서는 과연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를 알아보자.

 

선교의 모습을 성경에서 찾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성경을 어떤 관점에서 인용하느냐에 따라 그 해석 및 적용은 크게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보수적 입장에서는 그 출발점으로 신학은 ‘연역적으로’ 정립되어야 한다 하고, 에큐메니칼측에서는 ‘귀납적 방법’이 흔히 사용된다.

 

실제 처한 상황이 그 출발점이 되어 성서를 그 처한 상황에 비추어 읽으려는 것이다. 양자 중 어느 한 쪽만을 택한다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연역적 방법’을 추구한다 해서 성서가 말하고 있는 내용을 의심의 여지없이 입증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고, 또한 귀납적 방법은 실현 가능성은 있으나 정당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연구자가 좋아하는 혹은 찾고 있는 ‘해답’을 주는 성서적 자료만 언급하려는 경향이 쉽게 일어난다.

 

그러므로 성서 속에 선교에 대하여 철저한 정의와 변치 않는 개념이 있다고 보기보다는 성서에 대해 개방적인 자세에서 인간 구원을 위한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으로서의 선교 이해라는 보다 넓은 바탕 안에서 다양한 접근과 강조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려 해야겠다.

 

 

1) 구약 속에 나타난 선교

 

 

구약의 선교론에서 중요한 논쟁점은 "구약에는 ‘타문화 전도’라는 관점에서 선교가 있느냐"의 문제이다.

 

여기에 대해 2 가지 반대되는 견해로 나누어진다. 화란의 선교학자 블라우(Blauw)와 독일의 신학자 겐시헨(Gensichen)과 한(F. Hahn)은 구약에는 선교 명령이 없다고 한다. 블라우는 구약의 선교 사상을 보편주의(universalism)로 해석한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전세계의 하나님으로 구약에 나타난다. 그러나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과 일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구약에도 선교의 사상이 나타난다고 믿는다.

 

특히 순드클러(Benkt Sundkler)는 "구약의 선교는 구심적이요, 신약은 원심적"이라고 주장한 최초의 선교학자이다.

 

미국 기독교 개혁파의 리더(Richard R. De Ridder)는 그의 저서,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Discipling the Nations)"에서 구약의 선교를 생각하지 않고는 신약의 선교는 불가능하다고 함으로써 선교에 있어서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을 주장한다.

 

구약 성경은 해외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의미에서 선교 활동은 없으나 하나님께서 온 세계 민족 중에서 그의 백성을 불러모으신다는 사상은 창세기로부터 말라기까지 나타난다. 이러한 구원의 범위의 세계성이 곧 구약 선교의 뿌리이다.

 

얼핏 보기에 구약에는 선교 사상의 기초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이방 세계는 이스라엘에 대한 끊임없는 위협과 유혹의 대상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구약 성경을 충분히 연구하면 이방 나라의 장래가 중요한 관심사임이 분명해진다. 성경의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성경은 온 세상을 그 대상으로 삼았으며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온 세계에 미치는 것으로 전개되었다.

 

성경은 땅에 거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 모든 세계를 하나님의 피조물로 자주 언급한다.

 

창세기 1:1은 분명히 마태복음 28:19,20에 나타나는 지상 명령의 필연적인 기반이 된다. 창조관은 자연히 하나님께서 온 세계를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시 24:1, 33:13).

 

그리고 성경은 주님만이 유일한 하나님이라고 강하게 주장하기 때문에 여기에 선교 활동에 대한 강한 가능성이 포함되어 있다(신 4:39, 사 45:5,6).

 

이스라엘의 성별(聖別)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필요한 일시적인 구별이었으며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폐지될 것으로 간주되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부름을 받았을 때 그 안에서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3)는 확신을 얻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부르시고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세우신 것은 이스라엘만을 구원하시려는 데 그 궁극적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진정한 목적은 세계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들을 선택한 것이다.

 

이사야 43장 10절의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라는 구절이나 12절의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니라...” 등의 말씀에서 명백히 나타난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증인으로 선택된 무리였다.

 

구약은 기본적으로 에베소서와 골로새서가 찬송가의 형태로, 그리고 종말론적 환상 속에서 표현하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 위의 주권자이시다. 창조자이시며, 역사의 주인이시며, 구원의 근원이시다.

이런 의미에서 구약은 신약의 선교 이론의 근거이다.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의 선교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교 신앙은 선교를 모든 민족에게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 만한 모든 요소를 다 갖추고 있다.

 

구약의 다양한 우주론적 본문들을 조사한 겐지헨(H.W. Ginsichen)은(그 중에서도 특히 창 12:1-3, 암 9:2이하, 시 72:8이하, 사 2:2이하, 미 4:1이하, 제 2이사야(사 40-55) 여호와의 종의 노래, 말 1:11) 그가 발견한 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구약이 비록 하나님 백성의 선교적 사명에 대해, 민족들에게로 나가는 것에 관해 아무 것도 모른다 할지라도 구약은 구속사의 기본 틀에 속하며 결과적으로 그 구속사 안에서 선교는 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구약에 나타난 선교 사상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1) 모세 오경의 선교

 

모세 오경은 율법서이지만 온 세상의 이방 나라들과 이방 나라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 나타나 있다.

 

모세 오경에서 “이방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선교의 직접적 명령은 없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이스라엘에만 국한되지 않고 전세계적이며, 하나님의 역사(役事)는 이스라엘을 통하여 전세계에 알려져야 한다는 것이 오경에서 이미 나타난다.

 

첫째로, 창조 기사는 선교의 가장 중요한 기초이다. 창조 기사는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을 말하며, 또 신관은 유일신을 말한다. 창조의 사상은 세상에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해야 할 선교의 기초이다.

 

둘째로 타락의 사건은 선교의 원인이 되게 한다.

세째로, 창세기 11장까지는, 하나님은 특정 민족이나 국가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열국의 하나님임을 말한다.

 

네째로, 아브라함의 소명은 구약에 나타난 첫 선교의 명령이다. 창세기 12장부터는 아브라함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선택하시는 하나님, 즉 세계주의(universalism)에서 특수주의(particularism)로 전환한다.

 

다섯째로, 출애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부르신 것은 구약 성경에 나타난 선교의 절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섯째로, 이방인이 유대 나라에 가입된 것(출 12:38)은 장차 이방인들이 구원받을 것을 미리 암시한 것이다.

 

(2) 역사서에 나타난 선교

 

애굽에서 나그네로 살던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정착하여 신정국을 수립했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주위 문화에 동화되느냐, 아니면 분리되느냐 하는 긴장과 갈등의 연속이었다.

 

역사서에서도 역시 이방인들이 유대 사회에 상당수가 가입되었으며, 룻과 같은 여자는 구원 역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기생 라합은 이방인으로 구원받은 인물이었으며, 사르밧 과부에게 베푼 엘리야의 이야기(왕상 17:8-16), 아람 장군 나아만에게 전도한 이스라엘 계집종의 이야기(왕하 5:2-5)는 이방인 사회에서 무명의 평신도가 입으로 증거한 구약적 선교의 모델이다.

 

솔로몬이 인구 조사할 때 이방인의 숫자는 153,600명이나 됐다(대하 2:17).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의 대결은 영적 전쟁으로 역사의 하나님과 지방적인 자연신과의 대결이다.

 

역사서에서 선교 사상의 절정은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에 잘 나타난다. 그의 기도에서 성전은 이스라엘만의 것이 아니라 만민의 집으로 언급되었다(왕상 8:41-43, 사 56:7).

 

(3) 시편에 나타난 선교

 

시편은 메시야의 시로서 장차 오실 메시야를 예언하는데 이 메시야는 우주의 왕이시며,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경륜 아래 있음을 말한다.

 

시편의 중요한 사상은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이 세계적임을 강조한다(시 2:7-12, 22:27-31, 47:7-8, 67:3-7, 72:8-11, 96:1-13 등).

 

특히 시편 135:4에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목적이 잘 나타난다. 시편에 나타난 중요 사상은 이스라엘의 선택이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의 선포이다. 특히 시편 67:2에는 구원을 만방에 알리는 도구로서 이스라엘의 역할을 말한다.

 

특히 시편에서 이방 나라들이 하나님께 나와서 경배할 것을 예언하였다(시 68:31, 47:9, 72:10 등). 피터스(George W. Peters)에 의하면 시편에는 이방의 모든 나라에도 구원이 확대되어야 한다는 사상이 175회 나타난다고 하였다.

 

(4) 선지서에 나타난 선교

 

선지서에는 하나님은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셔서 이방이 구원받을 것을 말함과 동시에 이스라엘은 특권에 상응하는 책임을 다하지 못함으로 남은 자만 구원받을 것을 예고한다.

 

특히 선지서 중에서 이사야서는 선교의 본문으로 알려질 정도로 선교 사상이 강하게 나타난다. 선지서에 나타난 선교 사상은 ....

 

첫째, 하나님은 만민의 하나님이시다(사 2:1-4, 민 4:1-4, 렘 3:17, 사 25:6-9, 60장, 슥 8:20 이하).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의 범위가 세계적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도 전세계적이다(암 1:3-2:3).

 

둘째, 선지서의 선교는 이방인들이 자발적으로 구원을 사모하여 하나님께로 나아온다. 신약은 사도들과 전도자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땅끝까지 밖으로 나아가는 점에서 원심점이라면, 구약은 밖에서 예루살렘에 들어오는 점에서 구심점이다.

 

세째로, 선지서의 선교는 종말적 사건이다. 이방인이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은 먼저 종말적 사건으로 묘사되었다. 이스라엘을 뒤덮는 어두운 역사의 현실에서도 하나님께서는 항상 미래의 하나님으로 위로와 희망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신다. 종말의 때는 남녀 종들에게 성령을 주시며(욜 2:28-32),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 가득하게 하신다(합 2:14).

 

네째로, 선지서의 선교는 메시야의 고난을 통하여 성취될 것이다. 구약학자 영(E.J.Young)은 다음의 몇 가지 사실에서 메시야 예언과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동일시한다.

① 메시야는 왕적 권위를 가졌으며,

② 종말적이며,

③ 초자연적이며,

④ 구원론적이며,

⑤ 메시야는 인간이면서도 신이다.

 

 

(5) 요나서에 나타난 선교

 

요나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고립, 즉 특수 집단 정신과 이스라엘의 종교적 협소성을 얼마나 싫어하시는가를 보여준다.

 

아주 경건한 사람이며, 느헤미야와 에스라의 개혁 시대에 성장했던 요나는 니느웨에 회개의 선포자로 가기를 거부하고 달아난다. 이교도 항해인들은 인정 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들은 요나를 구하고 그의 하나님을 진정시키려고 한다.

 

그 이후에야 요나는 이교도인이며 타락한 니느웨의 거민들에게 전파한다.

그리고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자비롭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으로 드러내시며 요나는 그래서 화를 낸다.

 

하나님은 아주 어렵게 요나의 편협함과 경건의 협소성을 그로 하여금 깨닫게 하신다.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욘 4:11). 계시의 하나님은 그분의 구원으로부터 어떤 사람도 배제하지 않으시는데, 이것은 구약에서도 그러하며, 신약에서는 더욱 더 그러하다.

 

 

2) 신약에 나타난 선교

 

(1) 예수의 목회

 

사랑은 신약성서 메시지의 본질이며, 특히 예수의 경우에는 더 그러하다.

 

비록 복음서에서 예수가 이방인들에 대해 별로 언급한 것이 없어서 난처할 때도 있지만 선교의 진정한 기초는 다른 측면, 즉 예수의 경계선 없는 사랑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 점이 당시의 다른 종파들과의 차이점이며 선교상의 개념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사회에서 버림받은 자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선포함으로써 유대 가치관에 도전하고 특히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을 부각시킴으로서 근본적 개혁을 했다.

 

또한 예수는 탕자의 비유를 들어 행위와 성취의 오만으로 인한 인간 스스로의 모든 의롭다함에 대하여 뿌리를 잘라 버렸다. 또한 그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통해서 유대 민족적인 모든 독선과 혈통의 자만심을 폭로하였다.

 

선교의 성서적 근거를 모색한다면, 그것을 성서적 언약 백성과 그 주변 나라들의 어떤 사람들과의 만남에 대한 우발적인 구절에서 찾기보다는 사랑과 자비의 종교인 성서적 종교 속에서, 그 본질적 요소인 사랑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이 가장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종교가 선교적 종교일 수밖에 없다.

 

(2) 지상위임령

 

역사라고 하는 것은 가득 찬 현재를 의미한다. 이것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증언되었다.

 

그리고 뚜렷하게 때가 가득하게 찬 것에 대한 깨달음이 초대 교회로 하여금 선교에 참여하게 했다. 바리새파, 엣세네파, 그리고 혁명파들이 현재를 아무 것도 아닌 것, 텅 빈 것으로 보았던 반면, 예수의 제자들은 나사렛 예수의 사역과 더불어 시작된 현재의 가득함을 볼 줄 아는 자들이었으며 그리하여 공관 복음서는 이 시기를 카이로이(kairoi)라 칭하였다.

 

현재에 대한 희망과 비젼이 그들로 하여금 선교에 적극 참여하게 했으며 예수 부활 이후의 시기에도 카이로스 안에 살고 있다는 확신은 변하지 않고 오히려 더 확대되고 깊어졌다. 부활과 성령 강림은 현재가 계속 가득하다는 것을 의식하게 해주었고, 또한 이 두 사건 때문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세계와 관련을 가지며, 선교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기초 위에서 마태 28:18-20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러 해석의 가능성들이 있지만 다음의 몇 가지는 부정할 수 없다.

즉 이 본문은 지금 여기 우리에게 예수의 권위에 근거하여 주는 위임령이 있다는 것이며, 이 위임령은 예수의 제자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시대가 출발하였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며, 또한 이 위임령은 제자들로 하여금 세계 선교에 참여하라는 것을 의미함이 부인될 수 없는 점으로 계속 남는다.

 

교회는 세계에서 선교 활동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때’에 공헌한다. 하나님이 모든 민족에게 보내시는 것은 ‘이념’ 또는 ‘영원한 진리’가 아니다. 하나님은 역사적 인물들, 사람들을 보내신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통하여 계시하시고, 그 아들로 인한 제자들 안에서 또한 자신을 계시하신다.

 

(3) 다른 사람을 위한 교회 - 선교

 

우리는 고통과 선교 참여의 묘한 조화 속에서 선교의 성서적 근거를 제시하는 세 번째 요소를 발견하게 된다.

 

구약에서 선교 관념은 바벨론 포로시기에 특히, 고난의 종이란 사람으로 해서 가장 높고 가장 깊은 점에 도달했듯이 신약에서의 가장 높고 깊은 선교 관념은 인자의 고통으로 특히,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자기 삶을 내어 준 골고다에서 절정에 달한다. 예수 자신의 고난과 죽음으로 인해 예수는 가장 신실한 선교사였다.

 

교회의 선교에 대하여 이 점은 신약 시대에 매우 중요한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나사렛의 랍비, 예수를 따르는 것은 그의 지도 아래 앉아서 율법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는 것을 의미했다.

 

바울 노선의 선교와 고린도에 있던 그의 대적자들의 선교와의 차이점은 십자가에 놓여 있다.

 

고린도후서는 명백하게 선교를 십자가와 동일시하여 보여준다. 골로새서를 통해 볼 때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자기 육체에 채우면서 고난 가운데 기뻐한다(골 1:24).

 

예수가 가끔 사용한 누룩, 빛 그리고 소금의 비유적 표현은 모두 다 어떻게 보든지 간에 경계선을 넘는 것과 퍼져 스며들어가는 개념을 말한다.

 

엘톤 트러블러드는 이 세 가지 은유에 대하여 이렇게 관찰한다. 가장 놀라운 것은 이 세 가지 다 제 용도에 쓰여지지 않고 그냥 보관되면 그 본래 기능을 발휘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각각 가진 본질은 과감하게 소모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리젠이 말하기를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으로 찾으시는 가장 깊은 의미는 약한 증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힘없는 대변자가 메시지를 전한다는 것이다. 인도를 받고 구원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말하자면, 항상 복음의 증인을 십자가에 달리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4) 하나님의 선교

 

신구약 성서를 신중히 검토하면 하나님 자신이 선교의 주체자임이 나타난다.

 

구약은 민족들이 이스라엘을 향해 모이는 것으로, 선교를 구심적으로, 나아가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로만 이해하고, 반면에 신약의 선교 이해는 이스라엘 또는 교회에서부터, 그 중심에서부터 선교사들이 세계 속으로 흩어져 나아가는 ‘인간의 일’로 파악해 온 것이 관례이다.

 

이렇게 되면 자칫 하나님과 인간은 서로에게 배제당할 수 있는 위험이 따른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경험은 하나님이 자기 삶을 주장하시도록 맡기면 맡길수록 그는 더욱더 자기 이웃을 섬기고 사랑하고 용서함에 있어서 이유를 갖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복음의 빛 안에서 또한 구약의 빛에 의해서도 교회의 선교가 하나님의 활동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더욱더 우리는 그 선교를 우리의 활동이라고 마땅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선교에 참여하는 것은 다음의 이유 때문이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예수에게 주어졌고(빌2:9), 죽음으로부터 다시 일어난 그의 놀라운 행위에 의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기 때문이다(롬1:4).

 

또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기 때문에(고후 5:19)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둘로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이다(엡2:16).

 

만약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면 그 교회는 선교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의 증인과 함께 그 행위가 불신앙인들을 설득시킬 것이며(벧전 2:12), 그리고 불신앙인들의 어리석음과 무지를 잠잠케 해줄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새생명 때문에 선교는, 말하자면, ‘일어나는 것’이며 선교는 ‘되어지는 것’이다. 바울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널리 퍼지게 하신다는 것이다(고후 2:14).

 

하나님은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안에서 존재하시고 살아있는 믿는 자들 안에서 그리고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스스로 활동하고 계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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