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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7504 2011.05.04 13:26
나의 설교를 말한다(2) 100주년기념교회 이재철 목사
newsdaybox_top.gif 2011년 04월 28일 (목) 00:36:38 [조회수 : 2449] 지강유철 ( btn_sendmail.gif 메일보내기 ) newsdaybox_dn.gif

생명력 넘치는 한 편의 설교가 선포되기 위해서는 새가 두 날개로 날듯 설교자로 부름 받았다는 확실한 소명과 바람직한 설교의 노하우가 요청된다는 데는 재론의 여지가 없지 싶다. 하지만 “사악이 예루살렘 선지자들로부터 나와서 온 땅에 퍼짐이라”(렘23:14)”던 말씀을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오늘의 한국 교회가 세상의 조롱거리로 전락한 것이 강단의 오염과 변질 때문이란 진단이 옳다면, 특히 강단의 타락이 어떤 방식으로 설교해 왔느냐에 따른 결과라기보다는 설교자들이 ‘어떤 하나님을 믿느냐’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해결책도 달라져야 한다. 설교의 노하우 문제를 부정할 필요는 없겠지만 본질에 집중하는 것이 시급한 문제일 테니 말이다.

인터뷰를 위해 이재철 목사(100주년기념교회)의 설교를 다시 읽고 들으면서 그만이 가진 설교 노하우를 드러내고 싶다는 욕망을 버렸다. 이재철 목사의 설교에서 소위 ‘어떻게’의 문제를 규명하는 것이 핵심이 아니기도 하지만, 20여 년 동안 50매 분량의 원고를 토씨 하나까지 완벽하게 외우고, ‘모두의 목사’가 되기 위해 토요일은 장례나 결혼 등의 약속을 모두 거절하며 설교 준비에 매달리고, 주일설교 때만 입는 의복과 신발이 있을 정도로 설교에 헌신할 수 있던 원동력은 다른데서 찾아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인터뷰는 지난해 12월 22일 오후 9시 30부터 11시 40분까지 100주년기념교회 담임목사실에서 진행되었다.

설교의 두 가지 어려움

지강유철 / 20여 년 동안의 설교를 돌아보실 때 어떤 감회가 드는지요.

이재철 / 주님의교회에서는 목회를 처음 시작할 당시는 이미 교회의 용어나 메시지가 세상 사람들에게 더 이상 전해지지 않을 때였습니다. 때문에 전통적인 방식을 따라서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예화나 영화나 책 등등의 소재를 설교에 활용했던 것입니다. 세상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다 들어보니 성경과 교회의 이야기가 되도록 했다고나 할까요. 사도 요한도 구약용어로 하지 않고 '너희가 로고스를 알지 않느냐, 그 로고스가 바로 주님이야' 라고 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제는 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제 설교를 궁금해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때문에 굳이 바깥 이야기를 가지고 들어오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내부 이야기로 깊이 있게 설교해도 되겠다는 점을 분명하게 의식한 겁니다. 제 설교에 이러한 변화가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만 20여 년 동안의 제 설교를 주님 앞에서 되돌아보면서 저는 제 실력으로 된 게 아니고 모두 그분의 은혜였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끝냈을 때마다 “이건 내 것이 아니라 그분이 주신 것”이라고 늘 생각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지강유철 / 주님의교회 10년 동안 가장 어려웠던 게 설교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의미의 말씀이신지요.

이재철 / 설교가 어려운 것은 제 말을 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식이나 개인적인 논리를 풀어가는 것이 설교라면 아는 만큼 하면 되겠죠. 그러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서 전해야 하고, 어떤 설교를 하느냐에 따라서 예배에 참여한 교우님들의 한 주일이 달라지거든요. 잘못 전하면 교우님들의 한 주일이 망가지지만 하나님의 바른 통로가 되어 말씀을 전할 때 그분들의 한주일 삶이 바로 세워집니다. 그러니 설교는 항상 부담스럽고 어려울 수밖에 없지요. 저는 어떤 본문을 놓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가 어려운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영감을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표현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문학에서도 그 상황에 딱 들어맞는 단어는 하나밖에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시인은 그 한 단어를 찾으려고 밤을 지새우지요. 주님께서 제게 주신 영감들을 빈부귀천, 남녀노소, 지식의 유무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전하려다 보니 설교가 늘 힘들었습니다.

설교비평이 나가야 할 방향

지강유철 / 한국 교회 내에서는 설교에 대해서는 아직도 일종의 금기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사이에는 공공연하게 설교비평이 이루어집니다. 교인들은 설교에 대해 어떻게 균형을 잡아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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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철 목사. ⓒ 한국 <뉴스앤조이>
이재철 / 저는 설교비평이 시작되었다는 점을 굉장히 긍정적으로 봅니다. 설교자들이 경각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거든요. 하지만 설교비평이 순기능을 감당하려면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문학에서는 소설가, 시인, 평론가가 구분됩니다. 평론가는 평론만 하고, 소설가나 시인은 평론을 읽으며 자기 작품을 되돌아보지요. 그러나 설교평론이라고 하는 장르만은 없거든요. 설교비평을 하는 분들도 결국 설교자이지요. 만약 설교자가 설교비평만 계속 한다면 어느 시점에 가서는 한계에 부딪힐 것입니다. 평론이란 주관의 틀을 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비평가들은 설교비평과 더불어 자신이 비평한 설교 본문을 놓고 “나라면 이 본문으로 30분 동안 이렇게 설교하겠다”는 것을 직접 설교문을 써서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한국 교회에 설교비평의 문을 열어주신 그분들의 수고가 아름다운 열매로 결실할 것입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설교비평은 설교자의 목회 자리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가령 교인들의 지식수준이 어떤지, 그 설교자는 주일 설교 이외에 새벽기도회, 수요성경공부, 구역성경공부 등등은 어떻게 하는지를 함께 고려해봐야 설교자에게 도움 되는 비평이 될 것입니다. 설교자의 목회 자리와 함께 선포된 설교문의 시대 상황 또한 감안해야 합니다. 11월 23일에 연평도 포격이 있었습니다. 저는 다음 주일과 그 다음 주일에만 연평도라는 단어를 썼을 뿐, 그 뒤론 물론 앞으로도 안 쓸 거거든요. 연평도와 남북 경색의 시대 상황은 제가 용어로 표현하지 않아도 그 시대 상황 속에서 선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이 고려되지 않는다면 결과적으로 활자만 놓고 비평하게 되겠지요. 그러면 한 부분만 보는 설교비평으로 축소되겠지요. 이제 막 시작된 한국 교회의 설교비평은 이런 점을 보완되면서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럼 교인들의 입장에서는 설교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소설은 읽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느낌이 달라집니다. 설교비평가들 역시 비평가의 입장에서만 설교를 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교인들이 자기 교회 담임목사의 설교를 비평가의 입장에서만 본다면 신앙적인 삶을 영위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독자가 스스로 선택한 소설 속으로 들어가서 등장인물과 대화하며 즐겁게 소설을 읽듯, 자기가 선택한 교회에서 듣는 설교를 열린 마음으로 받을 수 있어야 신앙적인 유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지강유철 / 최근에 나온 설교비평집을 몇 권 읽으니 대다수 비평이 첫 부분의 상찬과 본론에 해당하는 설교비평이 서로를 부정하는 형국이더군요. 앞부분에서는 소위 우리 문학판의 ‘주례사 비평’이나 곡학아세가 아니냐고 할 정도로 설교자에게 상찬을 하고는 뒷부분에 가서는 설교자의 이제까지의 설교 전체를 한 마디로 매도하거나 그의 인격까지 부정한다는 오해를 살 정도로 비난을 퍼붓는 식의 설교비평이 과연 설교자의 마음을 어느 정도나 움직여 더 좋은 설교를 위해 분발하게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상찬이나 비판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앞의 상찬을 뒤의 비판이 무색하게 만들거나 뒤의 비판이 앞의 상찬을 ‘허무 개그’로 만들어서야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재철 / 우리나라에서는 활성화되지 않았지만 서구에는 전기문학이란 게 있습니다. 가령 이청준 씨에 대해서 비평을 하려면 그분의 일생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프랑스에서는 마르셀 프루스트가 남긴 전기보다 다른 사람이 쓴 프루스트 전기가 더 많거든요. 비평가는 소설가의 모든 삶의 자리를 다 알아야 비평이 되는데, 우리 설교비평은 시작단계이다 보니 지강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기본적인 신뢰의 문제가 발생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러나 종이에 프린트된 설교만을 비평의 대상으로 삼는 게 아니라 그 설교자 일생의 전문가가 되어 설교비평을 한다면 설교자의 삶의 자리, 시대 상황이 다 포함된 비평이 되겠지요. 그쯤 되면 설교비평가들이 어떤 말을 해도 잘 듣지 않겠습니까.

성경 전체로 확대되어야 할 교회력에 대한 강조

지강유철 / 목사님께서 강해설교와 차별화하기 위해서 명명하신 순서설교는 교회력을 무시할 뿐 아니라 “손오공의 도술처럼 청중들에게 필요한 영적 양식을 자유자재로 풀어낼 수 있는” 목사님의 탁월한 능력이 오히려 성서 본문의 침묵을 가져왔다는 정용섭 목사님의 지적을 알고 계실 것 같습니다만.

이재철 / 정용섭 목사님께서 그 비평에서 말씀하신 성무일과는 역사적으로 수없이 변경되고 보완되었기 때문에 아무도 원형을 모릅니다.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 교회의 성무일과가 동일하지도 않습니다. 만약 기독교가 초대 교회로부터 2000여 년 동안 확정되고 형식화된 성무일과를 사용해 온 게 사실이라면, 성무일과도 사도신경처럼 지켜야 할지 모르죠. 그러나 성무일과는 시대마다 끊임없이 변형되어 왔거든요.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구약성경의 초점이 '오실 예수'에 맞춰져 있고 신약성경의 초점이 '오신 예수'가 틀림없다면, 예수님의 부활이나 성탄절에 특정 구절만 놓고 설교하는 것이 오히려 성경을 축소시키는 게 아닐까요. 성무일과를 배제하거나 경시하자는 게 아니라 성경 전체로 확대시켜야 한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순서설교입니다. 제가 순서설교를 하기 때문에 설교 뒷부분에 가서 부활절에 대해 한두 번 언급하고 끝난다는 지적에는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부활에 관한 본문을 선택하거나 부활이란 용어를 많이 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설교 전체에 부활의 정신이 투영되는 게 더 중요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정 목사님께서 설교 전문자의 입장에서 제 순서설교가 주일설교로는 자격미달이고 교양 강좌나 신앙 강좌라고 지적하신 것은 허물 많은 제게 좀 더 잘하라고 채찍질하신 것으로 감사히 받겠습니다.

지강유철 / 성무일과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절대가 아닌 것을 절대화하는 건 아닌지요.

이재철 / 교회력이란 결국 그 절기의 정신이 아니겠습니까. 정신을 강조하기 위해 성무일과가 생겼다면 교회력에 있는 성경 구절만이 아니라 성경 66권 어디를 갖고서라도 설명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지강유철 / 정 목사님은 목사님께서 '기독교 신앙을 우리시대 크리스천들의 감동적인 일상 속에서 확인하려고 애를 쓴다'고 꼬집기도 하셨더군요.

이재철 / 저는 그 말씀이 명확하게 이해가 잘 안 됩니다. 감동적인 일상이라는 게 감동을 너무 작은데서 찾는다는 말인지…. 만약 그런 의미라면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역사학자들이 역사에 접근하는 전혀 상반된 두 가지 방법이 있지요. 하나는 심성사(history of mentality)입니다. 심성사는 한 시대를 관통한 역사의 정신을 가지고 개별 사건을 해석하지요. 거기에 반대되는 것이 미시사(microhistory)인데요. 미시사는 어느 조그마한 마을에서 벌어졌던 사건을 통해 세계의 역사를 살핍니다. 성경의 어떤 본문을 해석할 때 66권에 면밀히 흐르는 정신을 놓쳐서는 안 되는 게 당연하잖아요. 본문에 접근하는 방법으로는 다른 성경을 가지고 그 본문에 접근할 수도 있지만 아주 작은 사건, 아주 작은 미시사를 통해 접근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설교를 ‘심성사로 하느냐, 미시사로 하느냐를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두 가지를 병용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입니다.

지강유철 / 정용섭 목사님께서는 목사님의 설교가 “일상의 과부하에 걸렸다”는 지적을 하시고 싶었던 것으로 읽힙니다. 그 분에 의할 때 교인들이 이런 설교를 반복적으로 듣다보면 “청교도적인 콤플렉스에 빠지거나, 적당한 위선에 만족하는 신앙적 처세술”을 배우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재철 / 정용섭 목사님은 제 설교가 일상에 함몰되어 민족사라던가 세계사를 놓친다는 점을 지적한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설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성경에 대한 지식적인 규명이 아니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설교자는 자기 설교를 통해 성령의 성화되는 열매가 삶속에서 맺어져야 하고, 교인의 삶 속에서도 성령의 열매가 결실하도록 해산의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인들의 자잘해 보이는 일상에 따스한 관심을 갖는 것은 설교가 성령의 열매로 귀결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지강유철 / 목사님의 설교는 신학적 영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기존의 신앙을 강화하거나 이 시대에 요구되는 방향으로 개혁할 뿐, 신학적 영성을 심화시키지 못한다는 지적에 대해선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이재철 / 그 말씀도 겸허하게 받겠습니다. 제가 신학자의 신학적 영성을 못 따라가는 거야 당연하겠죠. 그러나 설교는 신학 강연이 아니고, 설교를 듣는 교인들도 신학도가 아닙니다. 신학적인 설교라는 게 뭘까요. 신학적 용어를 많이 쓰거나 신학이론을 많이 소개하는 것일까요. 하나의 신학만 있는 게 아니지요. 근본적인 신학에서부터 자유주의 신학까지, 신학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습니다. 신학은 신학적인 탐구와 신학적인 용어로 신을 알고자 하는 인간의 몸부림이고, 설교는 바른 신학의 토대 위에서 신앙적인 용어로 신앙적인 삶을 살게 만드는 몸부림이죠. 이처럼 신학자의 강연과 설교는 용어는 물론 방법도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전통적 해석을 넘어섰을 때 가능했던 종교개혁

지강유철 / 최근에 나온 <설교자여, 승부수를 던져라>를 보니 정인교 교수님은 목사님의 설교에서 상상이 사실을 앞지르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을 하셨던데요.

이재철 / 그런 경우가 많다고 하시고는 정작 예는 하나만 드셨더군요. 저의 요한복음 19장 23-30절 설교에서 문제가 된 부분은 26절이었지요.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이 말씀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예수님께서 어머니인 마리아에게 요한을 가리켜 아들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저도 전통적인 이 해석을 잘 압니다. 누구든 죽기 전에 하는 말은 평상시의 말과 다르거든요. 가벼운 말을 절대 하지 않지 않죠. 목회를 하면서 임종하시는 많은 분들의 마지막 말을 들었습니다. 만약 10분 뒤에 제 인생이 끝난다면 아내나 동역자나 아들들에게 불필요한 말을 하겠어요? 그래서 마지막 한마디, 한마디에는 무게가 담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는 말씀은 가상칠언 중 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 뒤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즉 "내 영혼을 당신에게 맡깁니다"라 하시고 돌아가셨지요. 27절에서 예수님은 "요한아, 너의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반면에 26절에서는 어머니 마리아에게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26절에는 ‘당신의’ 아들이라는 소유격이 없습니다. ‘귀네’라는 극존칭을 쓰면서 “어머니, 아들입니다”라고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그 어머니가 누굽니까. 자기를 뱄던 사람이에요. 누가복음 2장에는 어린 예수님을 데리고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을 때 시므온이 예수님에 대해 마리아에게 예언하잖아요.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고 말입니다. 마리아가 왜 예수님의 진짜 어머니입니까. 웬만한 엄마라면 지금 자기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못 박혀 죽고 있다면 십자가에서 끌어내릴 거 아닙니까. 예수는 요셉의 씨라고 절규하겠지요. 예수님께도 “너는 하나님 아들 아니야, 네 아버지는 저기 서 있는 요셉이야”라고 울부짖었겠지요.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한 것을 알고 있었고,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라는 예언의 말씀대로 자기 아들이 인간을 위한 제물이 되어 고난당할 것을 오래전부터 알았습니다. 때문에 자기 몸으로 낳은 아들이 지금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고 있는데도 그 앞을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하신 말씀은, “어머니, 아시죠? 이제 제 인생에서 할 일은 모두 끝났습니다. 이제는 요한에게 어머니를 맡길 테니 여생을 편안히 쉬십시오. 수고하셨습니다”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요한복음 19장 26절이 전통적 해석처럼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어머니, 이제 요한이 아들 노릇 할 것입니다”라는 의미였다면 소유격을 넣었어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병행구는 동일한 단어가 반복되니까요. 26절은 자기 배로 낳은 여자와 그 여자의 태에서 나온 예수님하고만 아는 교감을 담고 있거든요. 게다가 그 현장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던 사람이 요한이었습니다. 때문에 ‘요한아, 네 어머니’라는 말씀을 듣고는 그때로부터 60, 70세 노인이 될 때까지 마리아를 모셨습니다. 스승이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고난을 어떻게 치르는 지를 봤기 때문에 요한은 마리아를 지키기 위해 자기 일생을 던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인교 교수님께서는 제가 전통적인 해석을 거부하고 과도한 해석을 했다고 하셨습니다만 저는 이렇게 생각하지요. 모든 성경을 전통적인 해석의 틀 속에서만 해석해야 한다면 어떻게 더 깊고 새로운 영적 해석이 나올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만약에 저의 새로운 해석이 문법적으로 절대 틀렸다면 제가 틀린 것입니다. 그러나 제 해석이 문법적으로 옳다면 한번쯤은 다시 해석해 볼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성경에 대해 신실할 수밖에 없는 이유

지강유철 / 박윤선 목사님은 1970년대 초반에 쓴 잠언 주석에서 주역이나 불경을 비롯한 동양 사상이나 경전을 거침없이 인용하고 있습니다만 아직도 많은 설교자들이 타종교의 경전이 인용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태도입니다. 목사님께서는 설교에서 성경 외의 다른 책들을 어떻게 사용하십니까.

이재철 / 설교에서 세상의 책들은 얼마든지 인용될 수 있고 사용되어야 하지요. 왜냐하면 신비스러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수단은 수없이 많거든요. 세상의 책들이 사용될 수 없다면 예화도 사용되지 말아야 하는데,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에서 비유는 다 빼버려야죠. 예수님은 갈릴리에 있는 빈민, 배우지 못한 분들을 위해서 자연의 이야기, 자연의 텍스트를 예화로 사용했거든요.

지강유철 / 목사님께서는 설교 원고 전체를 외우고 강단에 오르지만 인용되는 성경구절은 반드시 보고 읽으십니다. 성경을 대하는 목사님의 태도가 은연중에 드러난다고 보면 될까요.

이재철 / 제가 다른 설교 내용은 다 외우면서 성경본문은 반드시 보고 읽는 것은, ‘이 부분은 제 말이 아닙니다’라는 사실을 교인들에게 보여드리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그렇게 하지요. 그래서 설교를 준비할 때는 물론이거니와 말씀을 전할 때도 그 분의 말씀과 그 말씀을 풀어내는 저의 말을 구분하는 것이 저의 철칙입니다.

지강유철 / 일점일획도 변함없는 하나님의 말씀에 번역 성경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목사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목사님의 말을 엄중하게 구분하십니다. 성경의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원어를 섬세하게 설명하시는 것과 번역된 성경을 정확하게 읽는 것 사이에서 긴장을 느끼지는 않는지요.

이재철 / 제가 성경 본문 말씀에 대해서 외경심을 갖는 것은 글자 자체가 아니라 그 글자를 품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외경심 때문입니다. 글자 속에만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축소되는 거잖아요. 성경 속의 글자가 하나님은 아니지만, 그 텍스트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제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는 바의 의미는 성경의 글자 자체 또는 번역된 성경 자체에 아무런 오류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정신을 품고 계신 말씀을 내 말로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분 앞에서 항상 겸손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설교자의 ‘공공의 적’인 말씀의 수단화

지강유철 / “설교자가 어떤 하나님을 믿느냐 하는 것이 어떤 설교를 하느냐를 결정짓는다.”는 존 스토트의 지적에 동의합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 발의 등이요 빛”이라고 고백했는데 성경에 대한 목사님의 고백이 궁금합니다.

이재철 / 성경은 그 속에 담긴 그 분의 뜻과 정신으로 인해 절대적이지요. 성경을 가지고 설교함에 있어서 늘 경계를 늦출 수 없었던 점은 어떤 경우에도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수단화해선 안 된다는 점이었습니다. 설교자는 은연중에 자기 목적을 위해서 말씀을 수단화할 수 있거든요. 설교자에 의해 수단화된 말씀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그분의 수단이 될 때 바른 설교자가 되는 거죠. 제가 순서설교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순서설교를 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강해설교를 한다면 한 주에 많은 본문을 가지고 설교해야 되니까 꺼리는 부분은 얼마든지 슬쩍 넘어가거나, 많은 구절들 가운데서 자신이 원하는 구절만 끄집어내어 강조하고픈 유혹에 빠지기가 쉽거든요. 그러나 한 절씩, 한 절씩 설교하다보면 그만큼 설교자의 의도는 배제될 수밖에 없죠. 사도바울은 사도행전 20장 28-30절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밀레도로 불러서 마지막 유언을 남깁니다.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에베소 장로들은 모두 바울이 전도하여 장로로 세웠던 사람들인데 이제 다시는 못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유언을 남기면서 너희들 중에 너희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이 나올 줄을 내가 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어그러진 말’이란 헬라어는 ‘디아스트렙호’로 왜곡시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도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고후 2:17)라고 말합니다. 그가 볼 때에 당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혼잡하게 한다는 뜻의 ‘카펠류어’라는 동사는 카펠로스라는 명사에서 파생된 단어로 행상인(行商人)을 의미합니다. 붙박이 점포를 가진 사람은 크든 작든 고객이 자기 동네사람이기 때문에 불순물이 든 상품을 팔 수 없지요. 그러나 행상은 오늘 물건을 파는 동네에 다시 온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포도주 한 병에 물을 타서 두 병을 만들어 팔 수 있거든요. 바울의 눈에는 수많은 설교자들이 행상처럼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 말씀을 우리 시대에 적용시킨다면, ‘적극적 사고방식’, ‘긍정의 힘’ 등등은 모두 불순물인 거죠. 적극적인 사고방식과 긍정의 힘을 가지고 세상에서 Top이 되어야 한다면 사도바울은 바보죠. 그분은 참수형(斬首刑)을 받고 죽었으니까요. 하지만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2절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우리말 성경은 고린도 후서 2장 17절과 4장 2절을 모두 ‘혼잡하게 하지 않는다’고 번역했지만 4장 2절에 사용된 헬라어는 ‘돌로어'인데 미끼로 쓴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볼 때 어떤 설교자는 불순물을 넣어서 말씀을 혼잡하게 하고,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목회적 야망을 위해 말씀을 미끼로 썼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2:17) 설교했습니다. 사람 앞에서 설교한 게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나는 어떤 경우에도 말씀을 나를 위한 수단이나 도구로 전락시키지 않는다’는 취지로 말할 수 있던 것 아니겠습니까. 저를 포함한 모든 설교자들이 평생 조심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강조되어야 할 부담과 ‘십자가로서의’ 설교

지강유철 / 많은 신학자들은 ‘설교가 기독교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것’이라고 하면서 설교자들은 타종교의 랍비나 스승들처럼 고대의 전통이나 경전을 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설교자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실로 엄청난 주장을 해왔습니다. 설교는 그 어떤 것으로 대체가 불가능한 기독교만의 독특한 제도라는 것이지요. 로이드 존스는 설교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이요, 가장 가슴 벅차고, 가장 짜릿하며, 가장 보람이 있고, 가장 놀라운 일”이라고 했던데요. 동의하십니까.

이재철 / 기독교가 태동된 시대적 배경을 아는 게 중요합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킬 당시의 로마가톨릭교회는 신부조차 성경을 모르고 집전을 했습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된 성경도 아닌 라틴어 성경을 안 읽는다고 불에 태워 죽이기도 했습니다. 교직제도를 위한 수단으로 로마가톨릭교회가 전락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반동으로 마르틴 루터는 ‘솔라 피데(Sola Fide)’,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교회를 ‘문트하우스'라고 했지요. ‘문트'는 독일어로 ‘mouth'라는 뜻이기 때문에 교회는 ‘설교의 집'입니다. 이와 같이 개신교가 설교의 집으로 태동되었던 역사적인 사실은 분명합니다. 지금도 천주교와 달리 개신교에서는 설교가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목사 자신이 세상에서 설교가 가장 위대한 일이고, 가장 가슴 벅차고, 가장 짜릿하고, 가장 놀라운 일이라 생각한다면 우월감을 갖지 않을 도리가 없지 않을까요. 그렇게 되면 설교자의 말이 자칫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혼동될 수 있어요.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설교가 없어서는 안 될 절대적인 요소라고 할지라도 설교자에게는 설교가 가장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소명이고, 의무이고, 십자가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말씀을 수단화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쳐서 복종시킬 수가 있거든요.

하나님의 생기로 회복되어 생령으로 살게 하는 설교

지강유철 / 저는 한국 교회의 교인들이 설교를 거의 듣지 않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설교자 자신이 설교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견고한 확신이나 기대가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 목사님에게 설교란 무엇입니까.

이재철 / 하나님께서 흙을 빚으셔서 당신의 생기를 불어넣어 주심으로 생령이 되게 하셨는데, 인간이 타락하면서 생기를 상실했지요. 그래서 인간은 흙으로 돌아가잖아요. 모든 인간은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미래의 흙인데, 그런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기로 회복되어 생령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 설교라고 저는 나름 정의합니다. 그 하나님의 생기를 전하려면 설교자 자신이 하나님의 생기를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설교는 먼저 설교자 자신을 위한 성화의 과정이고, 다음으로는 스스로 제물이 되어서 하나님의 생기가 사람들에게 전해지게 만드는 가장 큰 사랑의 실천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설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설교를 듣고 신앙 생활하는 사람에게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는 전 과정에 조금이라도 실수하지 않도록 더 철저하게 준비하는 이유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기의 통로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강유철 / 기록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말씀하신다는 확신이 설교자에게 가장 중요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옛적에 선지자나 사도를 통해 말씀하셨던 하나님께서 오늘도 설교를 통해 말씀하신다는 확신을 가진 설교자를 만나는 일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목사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설교를 통하여 오늘도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사람들, 특히 기독교 신앙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확신시키고 계십니까.

이재철 / 자신의 설교를 듣는 사람이 불신자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오늘도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분명하게 설교하고 있느냐는 취지로 물으셨습니다. 물론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설교했던 내용을 기록한 사도행전 13장 48절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자기를 온전히 던져 말씀을 전했지만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다 믿었던 건 절대 아니란 얘기입니다. 2000년 전 기록된 말씀이 오늘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란 사실을 어떻게 믿느냐고 제게 묻는다면, 또한 하나님께서 설교를 통해 오늘도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신하느냐고 물으신다면, 두 가지 대답이 가능하겠습니다. 성경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작품이 아닙니다. 성경은 제게 감동을 주거나 저한테 새로운 깨달음을 준 것으로 끝난 게 아니라 생명의 능력으로 제 인생을 바꾸어 놓았거든요. 허물투성이에다 부정하고 자격미달인 저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함께 신앙생활하시는 많은 분들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인간의 말로는 자기 자식도 바로 세우지 못 하잖아요. 그런데 다른 가정을 사람의 말로 어떻게 바로 세울 수 있겠습니까. 안 되거든요. 하지만 함께 성경공부를 하고, 주일 예배를 드렸던 많은 교우님들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제까지 버리지 못했던 것을 버리고, 잡아야 할 것을 붙잡고, 가야할 길을 걸어가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아니고는 설명이 불가한 일이지요. 만약 어떤 사람 설교에 거기 모인 모든 사람이 똑같이 호응을 했다면 그 사람은 재담가이지 설교자가 아닙니다. 항상 어디엔가는 반발하는 분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바울이 설교를 했어도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만 믿었지 않았습니까.

세상보다 세상을 더 잘 알아야 하는 설교자

지강유철 /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남아공화국 개혁교회의 앨런 부삭 목사님의 설교에서 억압받는 자의 울부짖음과 주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 또한 사회적인 문제들을 기독교적으로 해석하는 데 탁월하다는 평가가 있던데요.

이재철 / 설교자는 설교를 듣는 대상이 수도원 사람들이 아니고 세상 속에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그 말씀이 삶속에 적용되게 하기 위해서는 세상 사람들보다 세상을 더 잘 알아야 합니다. 성경만 알아서는 안 되는 거죠. 역설적이게도 의사는 우리의 건강을 지켜주기 위해서 병의 전문가가 되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세상은 밤이나 어둠이라는 겁니다. 설교자가 이 세상에서 빛이 되어 다른 사람들을 빛으로 살게끔 하려면 왜 이 세상이 어둠인지를 알아야 하는 거죠. 설교자는 의사가 병에 대해서 전문가이듯이 세상의 병리 현상에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설교가 매일 그런 것만 터치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 문제를 함께 해결할 방법을 찾다보면 설교에서 고통당하는 이웃의 울부짖음과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강유철 / 존 스토트는 어느 책에선가 자기도 대다수 복음주의자들처럼 너무 논리 정연하려는 욕구가 있음을 고백했습니다. 자기에게도 모든 사안을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으면 불편해 하는 약점이 있다는 거죠. 존 스토트가 너무 논리적이라면 목사님의 강단 언어는 너무 정제되어 있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성경이 보통 사람들의 시장의 언어로 기록되었다면 설교 언어도 시장 한 복판의 생생함과 평이함을 담아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재철 / 좋은 지적입니다. 제가 완성된 원고가 아니라 대지만 적어 올라가서 설교한다면 정제된 표현만 사용하는 현재의 원칙이 고쳐지겠지요. 하지만 성경은 시장의 언어로 기록이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신약성경을 베드로에게 주로 쓰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이집트에서 왕립교육을 받은 모세로 하여금 모세오경을 쓰게 하셨고, 다윗처럼 제왕의 경험을 가진 사람이 시편을 쓰게 했습니다. 예언서를 쓴 선지자들 또한 당시에 공부를 많이 한 제사장이 다수였습니다. 신약성경을 1/4이나 기록한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경을 주실 때 말을 주시지 않고 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말씀’이신데 당신의 말씀을 글로 주신 것입니다! 만약 설교가 그날 한 순간의 공기의 진동으로 끝나버린다면 어떻게 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설교를 두고두고 곱씹어 볼 수 있으려면 글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결국 문어체로 쓰느냐, 처음부터 구어체로 생각하느냐의 차이일 터인데, 제 경우는 문어체를 선택하다 보니까 정제된 언어를 사용하게 된 것이죠. 시간이 나면 저도 TV채널을 고정시키고 장경동 목사님의 설교 동영상을 봅니다. 저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고, 제가 갖지 못한 탁월한 능력을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더러 그분 흉내를 내라고 하면 못합니다.(일동 웃음)

예수님이 내 설교의 모델

지강유철 /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순서설교를 시작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주님의교회를 말씀으로 회복시키셨다고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 설교자는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태어난다는 로이드 존스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이재철 / 한 사람이 설교자로 살아가기까지는 수많은 요인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 많은 요인들이 개인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라는 의미에서 ‘설교자는 태어나는 것’이라 주장했다면 그 이야기가 맞습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남과는 다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의미였다면 거기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설교자로 태어난 게 아니라 철저하게 되어졌거든요. 누님이 다섯 분이나 계셨기 때문에 남 앞에서 말하는 것을 쑥스러워하던 저를 아버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웅변대회에 출전시켰습니다. 직접 원고를 써서 외우게 하셨고, 호흡은 어디서 끊고, 발음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혹독하게 훈련을 시키셨죠. 그때부터 중학교 졸업 때까지 부산과 경상도에서 있는 모든 웅변대회에 출전선수로 나갔어요. 지나놓고 보니 그 때 설교자로서 기본기가 갖춰진 거 같아요.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갑작스레 가장이 되었기 때문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나 생각해보니 유일하게 할 수 있던 일이 소장하셨던 책들을 읽는 것이더군요. 학교에 가서는 우두커니 앉아만 있었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1년 내내 아버지 서재에 있는 책들을 읽었습니다. 이광수 소설, 월탄 박종화 선생님의 삼국지 등등…. 한글로 읽을 수 있는 책은 다 읽었지요. 이 때 뭔가를 읽으면 정리하는 버릇이 저도 모르게 훈련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철저하게 믿음 속에서 저를 키우셨던 것, 그것에 대한 반동으로 튕겨져 나갔다 손들고 돌아 온 것이 모두 합력하여 선을 이루었습니다. 결혼을 하자 제 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게 뭔가를 삶으로 보여주었고, 홍성사를 경영하면서는 여러 작가들과 교제하는 가운데 그들과 함께 한 여행이 어떻게 소설로 형상화되는지를 보면서 글자만 중요한 게 아니라 글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글자와 글자 사이의 함축된 행간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방황할 때 신부님이나 스님들과 교제하면서 다른 세상에 대한 경험을 하였고, 가톨릭 시인이신 구상 선생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20년 이상 교제하면서 모태신앙을 가진 개신교인으로만 살아온 제 영혼의 백태가 벗겨졌습니다. 장신대 신대원에 들어가서 교수님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섭리하시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저를 설교자로 만드셨습니다.

지강유철 / 끝으로 목사님이 오늘의 설교자로 서는데 무엇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지 말씀해 주시지요.

이재철 / 하나님이시죠! 그분이 제 인생에서 경험하게 하시고, 제 삶속에서 정리하게 하셨고, 또한 그것들을 통해 훈련시키셨습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이나 우치무라 간조 등의 책을 읽으면서 받은 감동도 적지 않지만 저를 이런 모습의 설교자로 있게 한 결정적인 영향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제 설교의 최고, 최선의 모델이 되어주셨습니다.

지강유철 / 긴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재철 / 덕분에 다시 한 번 저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2000년부터 거의 매월 심층 인터뷰를 해왔지만 설교자를 인터뷰 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재철 목사와는 거의 매일 얼굴을 맞대야 하는 관계이고, 인터뷰 주제가 한국 교회 내에서 성감대처럼 예민한 ‘설교비평’이다 보니 심적 부담은 결코 작지 않았다. 게다가 이재철 목사의 빠듯한 연말 일정으로 인터뷰가 늦춰졌음에도 한 주간 독일 집회를 다녀온 다음날의 늦은 저녁에야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60을 넘긴 이재철 목사는 시차가 극복되지 않은 상황이었고, 자정이 거의 다 되어 끝난 인터뷰 이후에는 교인 문상(問喪)이 예정되어 있던 터였다. 때문에 이재철 목사의 답변을 들으며 떠오르는 많은 질문들은 목구멍으로 삼켜야 했다. 몇 가지 질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재철 목사는 설교비평이 전기문학처럼 한 설교자의 삶 전체는 물론 시대 상황과 목회 자리까지 모두 안 뒤에 이루어지면 좋겠다는 희망을 피력하였다. 나 또한 그런 설교비평가의 출현을 고대한다. 하지만 전기문학과 설교비평이 비교의 대상으로 적합한지의 문제는 더 따져봐야 할듯 하다. 비평에 있어서 작품 외적인 요소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놓고 문단에서는 아직까지 합의가 도출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출석교회 설교에서 비평적 관점이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설교를 들어야 한다는 이재철 목사의 말씀에 원칙적으로 반대할 교인은 없지 싶다. 문제는 열린 마음으로 설교를 듣는 게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비성경적인 설교가 범람하는 이 땅에서, 더는 교회 선택에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설교에 대한 바른 비평적 관점을 확보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느냐 묻고 싶었다.

셋째, 설교가 신앙의 강화와 신학적 영성의 심화 중 어디에 무게를 두어야 하느냐의 문제 또한 그리 녹녹치 않기에, 이재철 목사의 이야기를 더 들어봐야 했으나 그 또한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이러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인터뷰 끝에 떠올랐던 단어는 희망이었다. 설교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설교자의 말을 우직스럽게 구분하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유익이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거나 미끼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결단에 온 몸을 던진 설교자가 아직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기 때문이다.

인터뷰어 · 지강유철 / 양화진문화원 선임연구원, <장기려, 그 사람>저자

* <기독교사상> 2월호에 실린 글을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 무단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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