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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시대를 살아온 이들, 그들이 하나둘씩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 우리의 근현대사야말로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는 아픔의 역사다. 그 역사 한가운데서 꿈을 일구며 씨를 뿌려 온 사람들, 상처투성이 제 몸을 돌볼 겨를 없이 매 맞는 이웃을 감싸고, 헐벗은 겨레를 챙겼던 사람들,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가르쳐 준 이들이 그 치열했던 삶의 현장으로부터 잇따라 물러나고 있다. 아직 꽃이 피지 않았지만, 열매도 채 영글지 않았지만, 마치 그들의 ‘때’가 끝나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 이소선, 박용길도 그렇게 떠났다. 이제 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이 꾼 꿈을 이어 꾸고 대신 행할 때다.

믿음의 사람, 노동자의 어머니

   

▲ 고 이소선 여사.(유기협 블로그 log.naver.com//pppbbggg 갈무리)

노동자들이 핍박받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던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내가 죽으면, 좁쌀만 한 구멍이라도 캄캄한 데 뚫리면, 그걸 보고 끝까지 싸워서 구멍을 조금씩 넓혀서, 그 연약한 노동자들이 자기 권리를 찾을 수 있는 길을 엄마가 만들어야 해요”라는 아들 전태일의 부탁에 그는 “그래 아무 걱정 마라. 내 몸이 가루가 되어도 네가 원하는 것 끝까지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아들과의 약속을 지켜 냈다. 중앙정보부에서 내민 어마어마한 돈다발과 무시무시한 협박을 뿌리치면서, 노동운동의 ‘노’ 자도 꺼낼 수 없던 그 시절에 마침내 청계 피복 노조의 결성을 이끌어 냈다. 아들을 대신하여 아들이 되겠다는 ‘아들들’과 노동조합을 만들고 지켰다. 그가 아들과의 약속을 지킬수록 ‘아들들’은 늘어만 갔고, ‘아들들’이 많아질수록 그가 해야 할 일도 늘어 갔다. 유신 독재를 뒤흔든 동일방직과 와이에이치(YH)무역 노동자 투쟁, 박종철 고문치사 진상 규명 투쟁,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설립, 의문사 진상 규명 및 명예 회복 특별법 제정, 기륭전자·쌍용자동차 정리 해고 반대 투쟁 등 굵직한 역사의 현장에 그가 있었다.

180회의 구류 처분, 셀 수 없이 겪어야 했던 연행, 단식, 농성, 그리고 가난. 그 모진 세월을 견디며 ‘한길’을 걷는 동안 그는 어느새 노동자들의 ‘어머니’가 되었다. 청계천변 사람만이 아니라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도, 문익환 목사도 그를 ‘어머니’로 불렀다. 그렇게 그는 모든 이들의 ‘어머니’가 되어 ‘어머니’로 살았다. 저마다 이념과 정파로 나뉘어 옥신각신할 때도 어려움이 있는 곳, 인권이 짓밟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그들을 끌어안고 같이 울고 같이 웃었다. 사랑이 무엇인지, 해방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온몸으로 가르치는 그야말로 ‘어머니’였다. 그 흔한 노래방, 사우나 한번 가지 않고 창신동 구불구불한 골목길에 자리 잡은 옥탑방에 기거하면서 마지막까지 오롯이 자식들에게 모든 사랑을 쏟아 붓는 어머니로, 그렇게 살다 갔다.

배운 것이라곤 일제강점기 때 간이학교 다닌 게 전부이고, 자신의 이름 석 자 쓰는 것도 힘들어 했던 이소선이다. 무슨 사회운동의 경험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그 서슬 퍼런 유신과 5공 독재에 맞서 꿋꿋이 노동자의 편에 설 수 있었을까. ‘한길’을 걷게 한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그의 용기, 헌신, 사랑의 원천은 무엇이란 말인가. 사람들은 흔히 그가 했던 아들과의 ‘약속’을 거론한다. 못다 핀 아들의 삶을 대신 살았다고도 말한다. 그렇다. 그는 ‘그날’ 이후 한 번도 아들과의 약속을 잊어 본 적이 없고, 아들이 뚫어 놓은 구멍을 넓히기 위해 진력했다. ‘그날’이 없었다면 그는 언제까지나 평범한 아낙네로 살았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들이 투사라고 어미가 모두 투사일 수 없고, 아들과의 약속이라 해서 반드시 지키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더구나 그 길이 보통의 길이던가. 마음 한번 바꾸면 남은 자식들과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는데도 죽기보다 힘든 가시밭길을, 애오라지 그 ‘한길’을 가지 않았던가. 도대체 그 힘이 어디에서 나왔느냐는 말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그가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일찍이 이소선은 영양실조로 눈이 멀어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자, 예수 믿고 기도하면 눈을 뜬다는 이웃 사람의 권유로 교회에 나갔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기다시피 땅을 더듬으며 100일 동안 빠지지 않고 새벽 기도에 나갔고, 100일째 되는 날 거짓말처럼 눈을 떴다. 가난과 절망감에 빠져 한없이 추락하던 이소선의 손을 잡아 준 것이 바로 신앙이고 기도였다. 운명의 ‘그날’이 있기 바로 전날까지도 그는 금식 기도에 열중했다고 한다. 닷새 되는 날, 흰 두루마기 입은 남자들이 아들을 보자기로 싸서 데리고 가는 꿈을 꾸었단다. 꿈에서 깨어났는데 기분이 나쁘지 않고 참 좋았다고 한다.

구역예배를 드리다가 아들의 분신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가자마자, 하얀 거즈를 감아 입과 콧구멍만 겨우 드러내고 있는 아들의 가슴에 손을 얹고 “근로자를 위해 애쓰는 태일이 뜻이 이 모양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면, 하나님 뜻대로 하소서. 참새 한 마리도 당신 뜻이 아니고는 떨어질 수 없다고 하셨으니 이 가엾은 목숨도 당신 뜻대로 하소서”라며 기도했던 이소선이다. 기업이나 정부 쪽 사람들을 만날 때도, 소외된 노동자들을 찾아 거리 투쟁의 현장에 나갈 때도 항상 빼놓지 않았던 것은 기도였다.

그는 성경 속에서 삶의 지혜를 찾았고, 기도로써 하나님과 동행코자 하였다. 그런 그에게 노동자를 돌보는 일은 곧 신앙의 사명이자 소명이었다. 아들을 먼저 보내야 했고, “엄마, 배가 고프다”는 아들의 마지막 말을 가슴에 묻고 살아야 했던 그이지만 스스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살 수 있었던 것도 신앙의 힘이었다.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그는 밤마다, 때로는 밤을 꼬박 새우면서 기도했다고 한다. 무릎을 꿇고 앉아 아들의 이름을 부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구하고, 힘없는 노동자를 위하여 울며 기도했다고 한다. 그는 노동자의 어머니이기에 앞서 ‘믿음’의 사람이었고, ‘기도’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 믿음에 터하여 40년 세월 동안 곁눈질하지 않고 이웃 사랑의 한길을 걸어 올 수 있었다.

믿음의 사람, 겨레의 어머니 박용길

   

▲ 고 박용길 장로. ⓒ복음과상황 이종연

사람들은 박용길을 이야기하려고 하면 으레 문익환을 떠올린다. 통일을 꿈꾸며 서울역에서 평양행 기차표를 사고 싶어 했던 늦봄 문익환 목사. 부인 박용길은 분명 그의 길벗이었다. 그래서 호를 ‘봄길’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늦봄의 큰 걸음이 바로 그 봄길을 따라 걸었다는 사실에는 별로 주목하지 않는다. 문익환이라는 거목이 뿌리내리고 있던 대지가 바로 봄길이었는 데도 말이다. 문익환이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으로 감옥살이를 시작하자 박용길은 구속자 가족이 되어 이내 투쟁의 삶을 산다. <문익환 평전>의 지은이가 말하듯, “문익환의 등장이라는 현상 뒤에 숨어 있는 또 한 사람의 역사적 등장”이었다. 그 뒤 문익환과 함께했던 18년 가운데 12년 3개월을 옥에 갇힌 남편을 대신하여 바깥에서 싸웠다. 1989년 문익환이 평양 방문을 결심하고 추진하다가 국내 정세 때문에 방북을 포기하려 할 때는 “남자가 간다고 했으면 가는 거지, 이제 와서 중단이 뭐냐”며 결단을 촉구하기도 했다. 문익환이라는 거목은 이처럼 박용길이라는 든든한 대지 위에 터하고 있었다.

이소선이 노동자의 어머니라면, 박용길은 겨레의 어머니다. 1994년 1월, 문 목사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통일맞이 칠천만 겨레 모임’을 이끌면서 우리 시대 통일운동의 대모 역할을 감당하였다. 박용길은 거목을 뿌리내리게 한 대지였을 뿐 아니라, 그 또한 이미 거목이었다. 남과 북 사이에 긴장과 대결 분위기가 고조되던 1995년 6월에는 김일성 주석 1주기를 맞아, “남편을 통일의 제단에 바친 사람으로서 지도자를 잃은 북쪽 동포들과 유가족을 위로하기 위해” 방북을 결행하였고, 돌아오는 길에는 판문점 군사 분계선을 딛고 서서 “평화통일 만세”를 외쳤다. 분단을 이어가려는 무리에게는 천둥 같은 꾸짖음이었고, 그 현실에 무감한 이들에게는 폭포 같은 깨우침이며, 통일을 바라는 이들에게는 희망의 소식이었다. 물론 이 일로 일흔 여섯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옥고를 치러야 했지만, 그는 여생을 통일의 봄소식을 나르는 ‘봄길’로, 겨레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어머니로 살다 갔다.

경기여학교를 거쳐 일본 요코하마여자신학교를 나온, 당시로서는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거친 박용길이 ‘눈부신 미래’를 포기하고 고난의 길을 선택한 그 힘은 어디에 있을까? “6개월만 살아도 좋다. 남은 생은 선교에 바치리라”며, 폐결핵을 앓고 있던 병약한 문익환과 결혼했던 그다. 호화찬란한 엘리트 코스를 밟고도 세상과 친하게 어울려 지낼 수 없었던 원칙주의에 병약함까지 겹친 남편을 도우면서 묵묵히, “나이 50까지가 몫이고 나머지는 덤”이라며 살아왔다. 유신 독재의 모진 풍상을 겪으며 민주주의와 인권, 통일의 길을 쉼 없이 걸었다. 자신이 터한 삶의 바탕을 뛰어 넘어 애오라지 ‘옳은 것’을 향해 달려온 이 저력이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단언컨대, 그는 참으로 뜨거운 신앙인이었다. 일본 유학 시절, 군사 파시즘의 폭풍이 몰아치면서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거세게 일어나던 때에도 새벽이면 기숙사에서 빠져 나와 새벽 기도를 가고, 부흥회도 찾아다니고, 주일이면 기숙사에서 도시락을 받아 한국 동포들이 사는 하꼬방 동네를 찾아가 주일학교를 인도했던 그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전도사로도 사역했고, 33년 동안 한국기독교장로회 여신도회 임원으로 활동하면서 ‘믿음’의 삶을 살았던 이가 박용길이다. 그 ‘믿음’의 힘으로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이끌어 가는 구심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결코 개인의 피안에만 머무르지 않는 그의 뜨거운 신앙에서는 우리 시대 여느 기독교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신앙과 행동의 분리 따위를 전혀 찾을 수 없다. 그는 민주화, 인권, 통일이야말로 이 시대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으로 고백하며, 달려갈 길을 다 간 믿음의 사람이었다.

‘초월’에 기댄 사람들

이소선과 박용길은 확실히 ‘별난 사람’이다. 체제가 제공하는 우산 밑에서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넓은 문’을 박차고 체제에 맞서는 ‘좁은 문’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그들은 누가 보아도 ‘바보’이자 ‘별난 사람’이다. 그들은 여느 사람들과는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살았다. 그 생각과 삶과 행동 지향성에서 그들은 보통의 사람, 아니 그 시대 보통의 기독교인들과 구별된다. 이른바 기독교 지도자라는 사람들조차 독재자를 축복하고 권력에 줄을 대면서 자기네 이익을 탐하기에 바빴던 시절. 기독교가 더 이상 현존 체제와 질서에 질문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의 충실한 협력자이자 하수인이 되어 버린 패역한 세대에서도 그들만은 달랐다. 예루살렘 체제라는 현존 질서에 맞섰던 예수처럼 그들은 그 철옹성 같은 체제에 맞서고 이를 돌파하고자 했다. 비록 ‘열두 제자’ 명단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예루살렘 체제의 불의에 온몸으로 맞서며 예수를 좇았던 복음서의 여성들처럼, 그들은 체제가 주는 편안한 삶을 불편해 하며 현존하는 사회의 됨됨이를 의심하고 이를 바꾸고자 했던 ‘깨어 있는’ 여성이었다. 누군가를 차별하지 않고서는 자기네 자리를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 누군가를 짓밟지 않고서는 자기네 이익을 챙길 수 없다고 믿는 이들, 그들에 맞서 차별 없는 세상을 증언하고 하나 되는 나라를 선포한 사도였던 것이다. 그야말로 예수의 삶, 기독인의 삶을 꾸리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소선과 박용길에게서 기독교의 ‘알짬’을 본다. 기독교의 알짬은 결코 화려한 예배당이나 번드르르한 의식, 조밀한 신학 체계나 엄청난 교세 따위에 있지 않다. 그것은 모든 것 바깥에, 모든 것을 넘어서 있는 하나님의 속성, 그 초월성에 있다. 기독교는 현존하는 모든 것을 넘어설 수 있는 초월의 가능성과 능력을 지니고 이 땅에 들어와 유교 질서라는 현존 체제에 전투적으로 맞서 역사‧사회‧문화 개혁이라는 ‘소리 없는 혁명’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이소선과 박용길의 기독교는 바로 이 초월에 맞닿아 있다. 그들은 모든 것 위에 존재하는 하나님에 기대어 현존하는 것들을 뛰어넘고자 한 ‘믿음의 사람’이고, 그 ‘믿는 바’대로 산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초월의 믿음은 결코 이 세상을 방관하고 저 세상만 생각하는 내세신앙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이 세상 것들에 대한 집착을 돌파하는 믿음이다. 이소선과 박용길은 은둔과 도피를 추구하지 않았다. 삶의 현장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은 초월이 아니라 현존 질서를 인정하는 것임을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자신의 부활 또한 믿었기에, 이 세상과 맞설 수 있었다. 기적의 체험이나 뜨거운 신심이 그들을 피안의 세계에 묶어두기는커녕 도리어 현실에 맞서는 원동력이 되었다.

초월신앙은 사람이 만든 그 어떤 가치나 제도, 질서 따위를 절대화하지 않는다. 초월에 헌신하는 이들은 분단 질서도,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국가권력도 모두 사람이 만든 것이기에, 이 가운데 어떤 것도 절대의 자리인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을 수 없다. 하나님이라는 초월적 존재에 기대어 모든 현존 질서나 가치, 제도나 관습을 상대화하고 인간 삶의 형식과 내용 모두를 비판‧혁파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다본다. 이소선이 온갖 이념과 정파가 난무하는 운동의 현장에서 흔들림 없이 한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도, 박용길이 그에게 더해지는 갖가지 이념의 덧칠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초월에 기댄 까닭이다. 비록 이 믿음 탓에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지만, 그들은 또한 이 초월의 믿음과 부활의 신앙으로 민중의 부활·민족의 부활을 일구어 낸 노동자의 어머니·겨레의 어머니가 될 수 있었다.

초월의 믿음 안에서만 차별, 배제, 적대, 분쟁이 없는 평화가 가능하며, 초월의 믿음 안에서만 사랑과 헌신이 꽃필 수 있다. 초월의 믿음에 터할 때 대화와 소통이 숨 쉬는 생명 세계를 이룰 수 있다. 초월에 기대어 세상을 딛고 일어서는 삶, 이것이야말로 ‘이 세상에 있으면서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하늘의 삶이며, 오늘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바로 그 ‘기독교의 알짬’이 아닌가. 우리는 이소선과 박용길의 삶에서 기독교의 이런 알짬을 본다.

지금, 여기에서

오늘 우리는 분명히 ‘잘사는’ 나라에 살고 있다. 여러 가지 경제 지표며 생활수준이 이를 증명해 준다. 그런데 우리의 삶도 달라졌는가. 승자 독식의 경쟁 논리가 삶의 모든 부문을 잠식하면서, 살기 위해서는 이겨야 하고 이기기 위해서는 힘을 길러야 한다며 ‘총성 없는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 너 나 할 것 없이 패잔병으로 전락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옛날보다 잘살게 되었다는데 왜 이렇게 비정규직이 늘어만 가느냐”며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용 문제를 풀기 위해 싸워야 했던 이소선의 삶이 말하듯, 오늘 우리 현실은 그렇게 여유롭지 못하다. 게다가 21세기 문명사회라는 말이 민망할 만큼 이념과 체제의 편 가르기가 횡행하고 인권과 민주주의가 뒷걸음치는 마당에 마냥 손뼉치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우리의 기독교는 이 현실에 질문하고 맞서기는커녕 도리어 이러한 현존 질서와 한몸이 된 듯하여 씁쓸하다. 그냥 세상의 판박이 그 자체다. 지난날 역사의 ‘앞섬이’였던 기독교가 오늘에 와서 ‘뒷섬이’가 되고 말았다. 이는 우리 목회자들과 기독교인들이 삶의 가치 지향성에서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과 근본적인 차이점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더 이상 ‘별난 사람’이 아니라 ‘평균치의 인간’, 혹은 ‘평균 이하의 인간’이 되어 현존 질서가 요구하는 삶의 틀에 모든 것을 맡긴 채 쳇바퀴 돌듯 살아간다. 그들의 관심은 이 질서 안에서 편리하고 편안하게 사는 데 있을 뿐, 이 질서의 문제를 드러내고 바로잡는 데 있지 않다. 시세에 따라 교묘하게 옷을 갈아입고 힘센 자에게 아부하고 아첨하여 자기 자리를 보전하고 이익을 챙기는 재주꾼과 꾀배기들(?)이 교회 안팎에 넘쳐난다. 저마다 ‘넓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안간힘을 쓸 뿐이다. 그것을 교회가, 교회 권력이 쉼 없이 부추기고 있다. 강단에서 뿜어내는 메시지는 현존 질서나 가치에 맞서고 돌파하라는 것이 아니라, 순응하는 데서 오는 달콤한 대가를 즐기라는 것 일색이다. 여기서 무슨 ‘창조적 긴장’이 생겨날 수 있겠는가.

우리 신앙이 죽은 고백, 값싼 고백으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다시 ‘초월’의 돌파력에 기대야 한다. 초월의 가치와 이상에 대한 믿음을 되찾아 자신이 놓여 있는 삶의 바탕을 뛰어넘어 현존 질서에 맞서고, 그 질서를 정당화하고 신성시하는 모든 것을 혁파해 나가야 한다. 그런데 이 소망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가. 결국 지금의 기독교에 편안해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올 수밖에 없다. 현존 질서 중심부의 눈으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변두리 사람들에게 관심을 쏟는 이들, 기독교를 넘어서 예수를 이야기하고 그가 보여 준 ‘작은 자들과의 연대’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깨어 있는’ 이들, 현존 질서에 순응하는 ‘넓은 문’을 마다하고 현존 질서와 가치를 비판하며 돌파하는 ‘좁은 문’을 찾는 이들, 바로 초월에 헌신하는 사람들에게 소망이 있다. 우리가 이소선과 박용길을 기리고 그리는 이유다. 이제 남아있는 우리가 말하고 행할 때다.

박정신 숭실대 기독교학과 교수 cspark@ssu.ac.kr
박규환 숭실대 기독교학과 박사과정 treewood@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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